가쓰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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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쓰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가쿠슈인을 졸업하고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NHK에서 근무했으며, 일본-호주 협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88년 가쓰라노미야 궁가를 창설했으나, 급성 경막하혈종으로 쓰러져 후유증으로 휠체어를 사용하며 공무를 수행했다. 2014년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후사가 없어 궁가는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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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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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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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가쓰라노미야 |
휘 | 요시히토 (宜仁) |
신위 | 친왕 |
경칭 | 전하 |
오시루시 (symbol) | 계수나무 |
출생일 | 1948년 2월 11일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시나가와구, 가미오사키 |
사망일 | 2014년 6월 8일 |
사망 장소 | 일본, 도쿄도, 분쿄구,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 |
매장일 | 2014년 6월 17일 |
매장지 | 일본, 도쿄도, 분쿄구, 도요시마가오카 황실 묘지 |
아버지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
어머니 |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 |
친척 | 사촌 형 아키히토 |
궁호 | 가쓰라노미야 |
학력 | |
최종 학력 |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졸업 |
경력 | |
직위 | 일-호주-뉴질랜드 협회 총재 대일본농회 총재 대일본산림회 총재 일본공예회 총재 일본 옻칠 공예 협회 총재 대 스모 오스트레일리아 공연 명예 총재 가쓰라노미야 컵 전일본 수상스키 선수권 대회 명예 총재 |
가계 | |
왕가 | 일본 황실 |
훈장 | |
훈장 | 대훈위 파일:JPN Daikun'i kikkasho BAR.svg 파일:Cordone di gran Croce OMRI BAR.svg |
2. 생애
1948년 2월 11일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와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사이에서 차남(셋째)으로 태어났다. 가쿠슈인을 졸업하고 1974년부터 1985년까지 NHK에서 근무했다.[11]
1988년 1월 1일 큰아버지 쇼와 천황에게서 '''가쓰라노미야'''(桂宮) 칭호를 받아 궁가를 창설했으나,[15] 같은 해 5월 26일 급성 경막하 혈종으로 쓰러져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16][17] 오른쪽 눈 실명, 기억 장애, 오른쪽 반신 마비 등의 후유증으로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지만,[11] 1991년부터 공무에 복귀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에도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2008년 패혈증으로 입원했으며, 2014년 6월 8일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67세[2][3]에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 후계자가 없어 가쓰라노미야 궁가는 단절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48년 ~ 1988년)
1948년 2월 11일,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 사이의 차남(셋째)으로 도쿄 시나가와구 가미오사키에 있는 미카사궁 저택에서 태어났다.[9]
가쿠슈인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를 거쳐 1971년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소년 시절에는 학업이 우수했고 스포츠도 특기였다. 비틀즈를 좋아해서 밴드를 결성했고, 국산 스포츠카를 몰고 F1 레이스 등에도 정통한 면이 있었다.[10] 가쿠슈인 재학 당시 급우들은 그를 아버지의 궁호인 '미카사'라고 불렀다. 학습원 초등과 3학년 때 동급생에게서 "세금으로 생활하면서"라는 무심한 말을 들었다.[11] 요시히토 친왕은 동급생의 발언에 반론하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입고, 이 일을 계기로 성격이 변했다고 전해진다.[11] 1950년대 당시에는 황실이나 미야케의 존속이 우려되는 상황이었고, 미카사노미야가는 사회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일반인과 같은 검소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요시히토 친왕은 황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11] 학습원 초등과 이래 동급생으로는 사이고 다카모리로부터 4대 당주인 사이고 키치타로가 있다.
1968년 (쇼와 43년) 2월 27일, 20세 생일 후 성년식을 치르고[12] 대훈위에 서훈되어[13]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2년간 유학했다.
귀국 후, 1974년 (쇼와 49년)부터 1985년 (쇼와 60년)까지 일본방송협회(NHK)에서 촉탁으로 근무했다.[11]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호주 협회 총재에 취임했다. 그 외에 일본·뉴질랜드 협회 등 각 협회의 총재를 역임했다. 이때는 형인 도모히토 친왕이나 동생인 노리히토 친왕과 비교해 공적인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극히 적었다. 오랫동안 시종장을 맡아 미카사노미야 일가와 친밀하게 지냈던 이리에 스케마사의 일기에는 종종 요시히토의 병세나 컨디션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14]
백부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을 깊이 흠모했고, 또한 황족의 수가 이미 감소 추세에 있었기 때문에 다카마쓰노미야 사후 다이 니혼 농회, 다이 니혼 산림회, 일본 공예회, 일본 칠공예 협회의 각 총재직을 계승했다. 특히 다이 니혼 농회에서는 농업 발전에 공로가 있는 농가에게 수여하는 자백수유공장, 홍백수유공장, 녹백수유공장의 기장 수여식 등에 참석하는 등 표창 등 각종 행사에 참석했다.
1988년 1월 1일 큰아버지 쇼와 천황에게서 '''가쓰라노미야'''(桂宮) 라는 미야케를 하사받아 독신인 상태로 궁가를 창설했으나, 같은 해 5월 26일 급성경막하혈종으로 쓰러졌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으나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기억력 상실과 함께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되었다.
2. 2. 가쓰라노미야 궁가 창설 및 공무 (1988년 ~ 2014년)
1988년 1월 1일, 큰아버지인 쇼와 천황으로부터 '가쓰라노미야'(桂宮)라는 궁가(宮家) 칭호를 하사받아 독립적인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15] 이 궁호는 요시히토 친왕의 오시루시(개인을 상징하는 문양)인 가쓰라(계수나무)에서 유래했으며, 옛 세습친왕가 중 하나였던 구 가쓰라노미야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구별이 필요할 때는 '신(新) 가쓰라노미야'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해 2월 20일 궁가 창설 축하연이 열렸으며, 이는 현재까지 천황 직계 외의 마지막 궁가 창설 사례이다.그러나 궁가 창설 3개월 뒤인 1988년 5월 26일, 약 일주일 전부터 감기로 앓아누워 있던 요시히토 친왕은 침대 옆에서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었다.[16] 즉시 도립 히로오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수술을 받았다.[17] 정확한 병명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급성 경막하 혈종 등으로 보도되었다.[16][17] 당시 그의 오른쪽 얼굴, 어깨, 허리에 타박상이 있었다는 점[16]으로 미루어 넘어지거나 떨어지는 등의 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부터 비후성 폐쇄성 심근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같은 해 8월 의식을 회복했고[19], 11월에 퇴원했다.[20] 이듬해 1989년 초 쇼와 천황의 사망과 아키히토 천황 즉위에 따른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재활 치료를 거쳐 1991년 11월 공무에 복귀했다. 이후 오른쪽 눈 실명, 기억 장애, 오른쪽 반신 마비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안고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궁내청 직원의 도움을 받으며 공무를 계속 수행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상식, 외교 행사 등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2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일본 협회 10주년 기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고, 뉴질랜드도 방문하여 양국 간 우호적인 외교 관계 증진에 기여했다. 1997년 7월에는 스모 전시회를 홍보하기 위해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2008년 9월 28일, 패혈증 의심 증상으로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 긴급 입원하여 예정되었던 제63회 국민 체육 대회 참석을 취소했다. 같은 해 12월 2일 일반 병동으로 옮겨 재활 치료를 시작했고, 2009년 3월 29일 퇴원하여 궁저에서 요양했다.
2011년 겨울에는 흡인성 폐렴이 자주 발생하여 후두를 막는 성문 폐쇄 수술을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받았고, 이 수술로 인해 발성 능력을 잃었다. 같은 해 12월 30일에 퇴원했다. 이후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하다가 2014년 6월 8일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67세에 별세했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어 가쓰라노미야 궁가는 단절되었다.
2. 3. 투병과 사망 (1988년 ~ 2014년)
1988년 1월 1일, 큰아버지인 쇼와 천황에게서 '''가쓰라노미야'''(桂宮)라는 미야케(宮家)를 하사받아 독신 상태로 궁가를 창설했다.[15] 이는 오시루시(お印, 황족의 상징)인 가쓰라(계수나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옛 세습친왕가 중 하나인 구 가쓰라노미야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같은 해 2월 20일 궁가 창설 축하연을 열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직계 궁가 외의 마지막 궁가 창설 사례이다.그러나 궁가 창설 약 3개월 후인 1988년 5월 26일, 일주일 전부터 앓던 감기 증세가 있었던 가쓰라노미야 친왕은 침대 옆에서 의식 불명 상태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16] 즉시 도립 히로오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수술을 받았다.[17] 정확한 병명은 공식 발표되지 않았으나, 급성 경막하 혈종 등으로 보도되었다.[16][17] 또한 이전부터 비후성 폐쇄성 심근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급성 경막하 혈종은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 뇌좌상이 발생하고, 뇌에서 출혈이 일어나 경막과 뇌 사이에 피가 고여 뇌를 압박하는 심각한 상태이다.[18] 당시 친왕의 오른쪽 얼굴, 어깨, 허리에 타박상이 발견된 점[16]으로 미루어, 넘어지거나 떨어지는 등의 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8월 의식을 회복했고,[19] 11월에 퇴원했다.[20] 이듬해 1989년 쇼와 천황의 사망과 아키히토 천황 즉위에 따른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재활 치료를 거쳐 1991년 11월 공무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기억 장애와 오른쪽 반신 마비를 겪게 되어, 이후 궁내청 직원의 도움을 받으며 휠체어를 타고 공무를 수행해야 했다.
2008년 9월 28일, 제63회 국민 체육 대회 참석 예정이었으나 패혈증 의심 증상으로 급히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 입원했다. 같은 해 12월 2일 집중 치료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 재활 치료를 시작했고, 2009년 3월 29일 퇴원하여 궁저에서 요양했다.
2011년 겨울에는 흡인성 폐렴이 자주 발생하여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후두를 막는 성문 폐쇄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로 인해 목소리를 내는 능력을 상실했으며, 같은 해 12월 30일에 퇴원했다.
2014년 1월, 고열로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으며, 이후 발열 등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같은 해 6월 8일 오전 9시경, 상태가 위독해져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으로 구급 이송되었으나 이미 심폐 정지 상태였다.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오전 10시 55분, 급성 심부전으로 훙거(薨去, 황족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했다.[21][2][3] 향년 66세였다. 그의 사망으로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부부의 세 아들이 모두 사망하여,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남계 후손은 단절되었다.
사망 소식에 내각총리대신 명의의 애도 성명이 발표되었고,[22] 6월 10일부터 16일까지 7일간 일반인 조문이 이루어져 3,268명이 조문록에 서명했다.[23] 6월 17일, 도요시마오카 묘지에서 장례 의식인 '렌소노 기'(斂葬の儀)가 거행되었다.[4][25] 상주는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었으며 (상주 대리는 조카인 아키코 여왕이 맡음), 생전 친분이 있던 이치조 사네아키가 장례 위원장을, NHK 근무 시절 동료였던 하세 다카히코가 부위원장을 맡았다.[24] 황족을 포함한 약 560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5] 묘소는 같은 도요시마오카 묘지 내에 있는 형 도모히토 친왕과 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묘소 옆에 마련되었다.[25]
가쓰라노미야 친왕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자녀는 없었다. 사망 당시 일본 황위 계승 서열은 6위였다.
3. 가족 관계
다이쇼 천황
데이메이 황후
유리코
다카기 마사나리
다카기 구니코